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의 북벌 (문단 편집) == 북벌의 전략적 목적 == 북벌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밝힌 옛 도읍, 즉 장안과 낙양의 회복. 또 다른 하나는 사마소가 언급한 옹, 양주의 장악이 그것이다. 그리고 제갈량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원을 도모하여 위나라를 병합하는 것이었다고 배송지는 말하고 있다. 제갈량이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제시했던 융중대에 따르면 제갈량의 전략적 도안은 * 첫째, '''익주와 [[형주]]를 지배한다'''. * 둘째, '''오와 굳은 동맹을 맺고 동쪽의 우환을 없앤다'''. * 셋째, '''오의 도움을 얻어 위를 견제하고, 익주와 형주 양쪽에서 군을 이끌고 위를 압박한다'''. * 넷째, '''위에 변고가 일어날 경우 이를 노려 진군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 가장 중요했던 형주는 [[관우]]의 사망과 함께 물 건너 가버리게 되고, 이 때문에 발발한 이릉 전투까지의 과정에서 촉한의 주요인재와 병력 등이 쓸려나가게 된다. 거기다 [[맹달]]이 다스리는 상용마저 조위에 투항하고[* 형주가 빼앗긴 것만큼 상용을 빼앗긴 것도 타격이 컸는데 이 상용의 경우 양양과 완으로 진출할 수도 있고 장안을 견제하는 것도 가능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릉 전투로 오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제갈량이 생각했던 위나라 공략의 모든 전제 조건이 무너지게 된다.[* 위에 조조의 사망이라는 변수는 생겼지만 이미 앞의 3가지가 무너진 상황이었고 유비는 이릉대전을 택했다.] 이에 제갈량은 오와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맹달의 회유를 시도한다. 비록 형주는 완전히 촉한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상용만 되찾아도 상용을 통해서 양방향 압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는 성공했어도, 정작 맹달이 우유부단하여 촉에 투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마의에게 걸려 속전속결로 패망하고 만다. 결국, 두 방향으로 위를 압박해 진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려던 제갈량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상용을 놓치면서 제갈량의 북벌이 한중 북부 방면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한중 북부가 기산과 야곡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기에 전력을 어느정도 분산시키는게 가능했고 그랬기에 제갈량이 북벌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산 루트는 천수, 안정쪽으로 진군이 가능했고 야곡 루트는 진창이나 오장원으로 진군이 가능했다.] 위도 그쪽을 중심으로 수비를 하게 됐는데 체급 차이가 큰 촉이 공격 루트마저 한정되어 버린것이다. 그리하여 시행한 제갈량의 북벌의 최우선적인 전략적 목적은 '''관중'''과 '''농서'''를 얻는 것이었다. 정사에 수록된 사마소의 언급에 따르면 제갈량의 북벌 목적은 농서의 서쪽을 자르기 위함이었다 한다. 이 지역들을 얻는다면 촉은 위처럼 기병 육성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고대에 기병은 오늘날 전차에 비유될 수 있는 고급 병종인데다가, 위는 수만의 정예기병을 중심으로 대촉 전담인 정촉군(정촉호군)을 편성하고 북벌 때마다 활용했다. [[팔진도]]를 제갈량이 고안한 것도 기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목적이니 제갈량도 확실한 기병 육성을 할 여건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서는 이 기병을 육성하는데 탁월한 지역이었다. 물론 최종 목적은 후한의 [[레콩키스타|국토 회복]]으로 볼 수도 있다. 촉은 유비 이래 '''한실의 부흥''', 정확히 말하면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태어났듯, 후한 다음의 새로운 한의 탄생이 목적인 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비록 많은 이들이 한실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으나, 4백여 년 이상의 통치로 인해 한실 그 자체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은 다수 존재했다. 제갈량도 그중의 하나였으며, [[조운]]을 비롯한 다수 무장과 유비가 입촉할 때까지 그를 따랐던 인재 대부분이 바로 이 대의명분을 받들었던 이들이었다. 거기다 조위 내에서도 [[순욱]]처럼 한실을 지지했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촉의 한나라 부흥의 방침은 유비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 이념은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3군이 단숨에 촉에 호응하고 이후 관중의 민심이 촉에 쏠리는 등의 반응으로 어느 정도 구체화된다. 제갈량의 북벌 당시는 한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으므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자기 세대에 한나라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이용해서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위나라를 점령할 수는 없어도 옹주와 양주를 점령해서 힘의 균형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위의 국력이 압도적이라도, 간신히 복구한, 가장 생산력이 좋으면서, 후한 말 전란의 여파가 가장 오래간 옹, 양이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균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거기에 관중은 발전한 지역이었고 장안만 해도 충분히 교역의 중심 지역인 동시에 옛 한나라의 수도라는 정치적 입지까지 더해줄 수 있었다. 물론 관중과 장안은 그 때까지도 [[삼보의 난]]으로 인해 입은 피해가 채 복구되지 않았지만, 관중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자체는 여전했다. 그래서 촉한은 이 지역 주민들, 이민족들과 경제,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이 지역을 얻으면 한나라의 옛 중심지인 관중+파촉 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경제, 인적 자원의 시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진출과 물자 보급이 용이해지고 파촉에서부터 지속적인 무기 개발과 새로운 진법의 도입으로 위나라와 맞서는 게 가능했던 촉군에 군마 등 군수 물자를 지급해 전투력을 더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또 지리적인 이점도 있다. 동쪽은 장안 인근 관문을 통해 방어가 쉽고 반대로 조위는 방어선 길이가 늘어난다. 관중과 익주의 생산력으로 동관을 틀어막는다면 훨씬 적은 병력으로 나라의 유지만큼은 너무나 쉬워진다. 여기에 옹주 양주의 물산과 인구를 확실히 손에 넣고 서쪽으로는 외부 세력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가 열린다. 위나라가 소유한 중요 요지를 타격하고 2개 주를 위나라에서 갈라 촉에 소속시키는 것 이상의 시너지가 가능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정세야 그때 그때 변하는 것이니 버티다가 실제 관중을 근거지로 했던 다른 나라들처럼 천하를 통일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전국시대의 진(秦)이 그러했고, 한의 시조인 유방도 이 관중과 파촉을 근거지로 해서 초한대전 동안 유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다. 즉, 옹양주 겸병 그 자체가 촉한의 천하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했다면 촉한이 잡을 수 있는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셈인 것이다. 또 당시 양주 지방은 마초 및 양주 군벌들과 조조 세력의 전투가 214년까지 이어지면서 215년 이후에야 위의 행정 구역으로 들어왔다. 이후에도 반란이 이어져 당시 옹주자사였던 장기가 애를 먹었으나 그래도 겨우겨우 대충 반란은 안정시켰고. 이후 222년 옹주자사 대리로 부임한 곽회가 강인들을 흡수하면서 나름 행정력을 갖춰가게 되었다. 하지만 위나라는 오랜 내부의 전란으로 내부의 국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있으며 촉한이 북벌을 진행할 때마다 내부 반란+이민족들의 이탈 같은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여 단일한 국력으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위가 이전 후한 시기 9주의 국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모르되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아직 국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분이 일어날 때를 노려 위가 완전히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차지해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제갈량의 계책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실제로 제갈량의 융중대 조건은 국력을 키우는 상태에서 위에 내분이 있을 때 치고 올라가자는게 기본적인 전략이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위를 치기 위해선 위가 어느 정도 분열된 것을 상정했다는 것인 만큼 당초 계획이 상당히 무너진 상황에서도 위나라의 분열과 행정력 장악 부족 상황에선 시도해 볼 만했다. 이 당시 촉한의 입장에서는 북벌이 더 늦어지다가 곽회가 이 지역에 완전히 행정력을 미치고 촉 위 경계를 확정할 정도의 방어력을 갖춘다면 진짜 완전히 익주에 갇히게 되어 중과부적이 된다. 익주가 아무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 해도 힘에서 절대적인 격차가 난다면 100% 지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위가 가만히 있다면 몰라도 위 역시 목적은 다른 곳에 진공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원자(袁子)에서도 제갈량의 북벌은 소국의 입장에서 가만히 있으면 국력 차이로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위의 국력은 너무 막강해서 잠자코 있다가는 [[스노우볼|점점 차이가 벌어져서]] 언젠가는 위의 침공으로 멸망할 미래밖에 없으므로,[* 제갈량의 조카인 오나라의 제갈각도 숙부의 표문을 보면서 항상 비슷한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가만히 있기보단 좋든싫든 북벌로 명운을 걸어볼 필요가 있었다. 촉은 중앙 집권과 관료제의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효율적으로 국력을 운용했기 때문에 그나마 위나라와 정면대결을 할 건덕지라도 나왔지, 위가 제대로 내부를 수습하고 국력을 효율적으로 끌러 올린다면 촉의 열세는 필연이었다. 여기에 질적 우위까지도 위나라의 편이다. 당시 시점에서 촉, 오의 영토는 개발이 덜 된 지역이라 교육 같은 부분의 인프라가 위나라에 비해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위나라의 영토에는 여러 명문가와 호족들의 기반이 있기도 했다. 게다가 남방의 기후, 습도 등으로 촉, 오의 많은 인재들은 병으로 요절했던 반면, 위나라의 인재들은 정말로 오래오래 앉았다. 유비가 전국을 누비면서 긁어모았던 인재들은 하나 둘씩 노환 혹은 부적응으로 죽어가고, 여기에 이릉대전으로 상당수가 전사했거나 위나라에 투항했으니 인재 사정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촉한에 불리하게 된다. 실제로 강유의 북벌 시대까지 이어보면 사마의, 사마부 형제의 관서 진흥책이 성과를 보고 곽회가 계속 관중 지역의 행정력을 확대함으로써 강유가 매우 고전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는데, 강유의 북벌 시기조차 위는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다. 사마씨로 인한 정치 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수춘 3반란, 강유, 왕사 등의 농서의 강저족 회유 등이 있어 그래도 북벌을 해 볼만한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벌은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고 촉과 위의 국력차는 제갈량 이후 계속 벌어지게 되어 촉은 위에게 멸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기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안하면 죽는 환경'''이라 죽으나 사나 북벌을 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또 위나라 역시 제갈량 사후 촉한이 침공하지 않자 오히려 [[흥세 전투|대군을 이용해 한중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위나라 역시 언제든지 촉한이 그냥 가만히 있을 경우 막강한 물량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촉한의 북벌은 양국간 주 전장을 촉한 외부인 옹, 양주로 두는 일종의 [[예방전쟁]]적인 성격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